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주의”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가족, 학연, 지연과 같은 끈끈한 관계망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은 동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폰 보급률, 1인 가구 증가율, 정치적 다원화 지수를 기록하며 개인주의적 생활 양식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긴장은 철학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개인의 권리가 강조되는 자유주의적 논리가 공존하는 가운데, 유교 전통에 기반한 관계윤리가 여전히 강력한 규범적 힘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본 글은 동아시아 “공동체주의”의 역사적 토대와 현대적 변형을 살피고, 한국 정책·문화 현상 속에서 어떻게 개인 자유와 충돌 혹은 상보적 작용을 하는지를 고찰합니다. 나아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동선과 사적 자유를 조화롭게 맞추기 위한 현실적 제언을 탐색하고자 합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 원격 근무와 탈중앙화 금융(DeFi)의 부상은 사회적 소속감과 개인적 이동성 사이의 경계를 재정의했습니다. 블록체인 기반 거버넌스 모델은 지역·국가를 초월한 집단 의사 결정을 가능케 하며, 이 과정에서 “공동체주의”가 기술적 프로토콜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탈중앙화 자율조직(DAO)이 사회 공헌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기여도에 따라 토큰을 분배하지만 디지털 공동선을 우선으로 설정하는 논의가 활발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시민에게도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1. 동아시아 전통과 공동체주의의 기원
1.1. 유교 관계윤리의 핵심 개념
“공동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아시아 고전 윤리사상의 심장부를 차지하는 유교를 살펴야 합니다. 공자와 맹자는 인간을 고립된 원자적 존재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인(仁)”은 타자와의 상호 돌봄을 의미하며, “예(禮)”는 그 돌봄을 구체적 행위로 표현하는 사회적 장치였습니다. 서양 근대의 자연권 사상과 달리, 유교는 보편적 인간권리를 추상적으로 선언하기보다 가부장적 가족, 군신, 장유질서 같은 미시적 관계망 속 역할 규범을 통해 질서를 구현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 한국에서도 효(孝)에 대한 법적·문화적 기대, 명절 귀성 문화, 직장 내 선후배 호칭 관습 등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별 행위자의 자율성을 해석할 때도 관계적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의 토대가 형성됩니다.
동시에 유교는 단순히 권위주의적 질서만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군주라도 도덕적 정당성을 잃으면 “혁명”을 통해 폐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백성의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폭정과 맞서 정당화된 저항권을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전통 내부에서도 개인의 목소리가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즉 동아시아 “공동체주의”는 개인 권리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관계적 책임과 결합된 권리로 재해석합니다.
더 나아가 조선 후기에 형성된 향약 제도는 지역 공동체가 자치 규범을 세우고 상호 부조를 제공한 사례로 주목됩니다. 향약은 현대 마을회, 새마을금고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구성원은 상호 감시와 공개적 토론을 통해 도덕적 규범을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공동체주의”는 국가 권위에 종속된 수직 구조만이 아니라 수평적 자치를 실험한 장면도 포함합니다.
1.2. 개인 권리 담론과의 초기 조우
19세기 말 개화기 조선 지식인들은 국제법, 천부인권이라는 새로운 어휘를 일본어 번역서를 통해 접했습니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전통 윤리와 개인 권리 담론이 처음 대면한 순간이었습니다. 박영효와 김옥균 등이 제안한 갑신정변 헌의 14개조에는 신분 폐지, 과세 평등, 인재 등용 등 근대적 시민권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와 왕실을 보좌한다”는 유교적 충효 어법 역시 유지되었습니다. 이중 코드는 이후 대한민국 헌법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1948년 제헌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규정하면서도, 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라는 국민 공동체 서사를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초기 근대화 단계부터 한국은 자유주의적 개인 권리와 “공동체주의”적 공익 의무를 혼합해 나갔습니다.
1.3.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본 공동체주의 전통
비교철학 연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 윤리, 아프리카 우분투 윤리 등이 동아시아 “공동체주의”와 어떻게 교차하는지 탐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스 공동체 속 덕 있는 시민을 강조한 점, 우분투가 “내가 곧 우리”라는 전제를 두는 점이 모두 관계적 인간론이라는 공통분모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유교의 “공동체주의”는 가족 중심 서열을 기반으로 하기에, 공·사 영역 구분과 젠더 평등 문제에서 더 큰 도전을 받습니다. 이러한 비교는 한국 사회가 보편 윤리와 특수 문화 사이에서 어떤 변형 가능한 문화적 번역을 수행할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1.4. 중국·일본의 관계 윤리와의 비교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도 전통 윤리에서 발견되는 관계 중심적 가치가 현대 정책에 스며 있습니다. 일본의 이바시라(居場所) 개념은 지역 공동체에서 ‘머물 곳’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의미하며, 고립 노인을 지원합니다. 중국은 샤오캉(小康) 사회 건설 목표 아래, 농촌 가족이주 노동자의 도시 정착권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국가 모두 고령화 속도가 빠르면서도 가족 규모가 축소되어, 관계 의무를 국가·지역으로 이전하려는 공공정책 실험이 활발합니다. 이 비교는 한국이 직면한 복지·돌봄 문제를 맥락화하며, 국제 경험을 활용한 혁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2. 정책 사례: 가족주의 복지 시스템의 빛과 그늘
2.1. 노인 부양 의무와 국민연금
한국 복지국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족 의존적 설계입니다. 공적 부조가 충분하지 않은 영역을 사적 가족 네트워크가 메꾼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 유산이 선명합니다. 이를테면 2021년까지 유지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은 저소득 노인이 기초생활급여를 신청하려면 자녀의 소득·재산을 먼저 심사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녀와 갈등 관계인 노인은 제도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곤 했습니다. 정부는 2022년 부분 폐지를 결정했지만,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자식을 둔 부모는 국가보다 가정이 책임져야 한다”는 정서가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구조는 “공동체주의”가 개인의 사회권 실현을 어떻게 제약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예시입니다.
한편 국민연금은 근본적으로 개인 납입액에 기반한 기여·소득비례 방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산업화 세대가 대가족 체제에서 노후를 의존해 왔다는 점을 고려해, 부양가족연금 같은 가족 단위 급여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전통적 효 문화와 근대적 사회보험 논리가 타협한 결과이며, “공동체주의”가 복지 설계에서 여전히 설득력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2. 출산 장려 정책과 여성의 경력권
출산율 하락은 “공동체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시험하는 쟁점입니다. 정부는 다자녀 특별공급, 육아휴직 급여 확대, 아동수당 등을 통해 가족 단위 복지를 강화해 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여성은 경력 단절과 돌봄 부담이 실질적으로 완화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전통적 성 역할 분담을 유지한 채 출산만 독려하는 정책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개인 자유를 침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1인 가구와 비혼 가구가 급증하는 현실에서, 가족 중심 출산 장려책은 선택하지 않은 시민을 배제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주의” 가치인 인구 공동선과 개인 자유를 조화시키려면 돌봄 인프라의 국가 책임을 강화하고 성평등한 노동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2.3. 장기요양보험과 돌봄 노동의 사회화
한국의 장기요양보험제도는 2008년 도입 이후 급속히 확장되며, 가족 내 무급 돌봄 부담을 제도화된 사회보험으로 이전했습니다. 돌봄 활동이 국가 공적 서비스로 전환되면서, 전통적 “공동체주의”가 개인의 성별 역할을 고정하던 관성을 부분적으로 해체했습니다. 그러나 요양보호사의 낮은 임금과 감정노동 문제가 남아, 공동체 가치가 ‘돌봄의 사회적 인정’으로까지 확장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이는 “공동체주의”가 가족 범위를 넘어 사회 전체로 재해석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2.4. 지역사회 돌봄 모델과 사회적 경제
행정안전부가 추진하는 지역사회 통합 돌봄(커뮤니티 케어) 선도사업은 노인·장애인이 살던 곳에서 돌봄을 받도록 지원합니다. 여기서 ‘마을’은 국가와 가족 사이의 중간단위로서, 전통적 “공동체주의”의 현대적 실험실이 됩니다. 시흥시는 사회적 협동조합과 연계해 방문간호, 주거 개보수를 제공하며, 이용자는 자신의 생활리듬을 유지하면서도 자율성을 보호받습니다. 사회적 경제 주체가 주도함으로써, 돌봄을 시장 거래가 아닌 관계적 가치로 전환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자체 예산 의존도가 높아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있으며, 서비스 품질 관리 지표가 표준화되지 않았다는 점이 과제로 지적됩니다.
2.5. OECD 비교지표가 말하는 한국 복지의 특수성
OECD의 Social Expenditure Database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공공 사회지출은 GDP 대비 12.7%로, 회원국 평균 21.1%에 크게 못 미칩니다. 특히 가족·노인 부문 현금급여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고, 조세 지출(세제 혜택) 형태가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제도 외부의 돌봄·부양 기능을 여전히 가정이 수행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교육 분야 지출이 평균을 상회한다는 사실인데, 이는 학부모 사교육 투자와 맞물려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반영합니다. 결국 복지의 범위와 구조를 설계할 때, 재정적 효율성뿐 아니라 문화적 기대와 사회적 신뢰를 함께 고려해야 함이 드러납니다.
3. 문화 현상: 온라인 커뮤니티와 공적 담론의 재편
3.1. 세대·젠더 갈등 속의 관계윤리 재구성
2020년대 한국 온라인 공간에서는 ‘MZ세대’와 ‘586세대’,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 간 갈등이 자주 표면화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각 진영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때 모두 “공동체주의”적 언어를 차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장년층은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온 것은 집단 헌신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연대 의무를 강조합니다. 반면 젊은 층은 “공정한 규칙이 무너진 공동체주의는 기득권 카르텔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크라우드 펀딩, 팬덤 기부 등)를 선보입니다. 이처럼 디지털 문화는 전통 공동체 조직을 해체하는 동시에, 네트워크 기반 ‘느슨한 공동체주의’를 만들어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양면성을 지닙니다.
3.2. 코로나19 방역 사례: 집단적 선의와 자유의 상호작용
코로나19 초기 한국의 고강도 방역 정책은 해외 언론으로부터 “공동체주의”적 협력 모델로 평가받았습니다. 마스크 착용, QR 코드 출입명부, 방역 앱 자가진단 보고 등은 개인 정보 공개를 전제로 했지만, 다수 시민이 이를 감수했기에 확산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방역패스 도입 과정에서 “백신 접종을 거부할 자유”와 “집단 면역이라는 공동선”이 충돌하였고, 헌법소원과 행정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법원은 비례성 원칙을 기준으로 일부 조치를 제한하며 개인 자유를 보호했습니다. 이 사례는 위기 상황에서도 “공동체주의”가 절대적인 규범이 아니라, 민주적 숙의를 거쳐 조정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마스크 착용 의무는 2022년 단계적 해제 과정에서, 장애인·노년층의 건강권과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 자유가 첨예하게 충돌했습니다. 교육부는 학교 방역 지침을 수정해 투명 마스크 지원을 확대했고,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수어 통역 방안을 병행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공동체주의” 감염 예방 목표를 유지하면서, 개인이 처한 특수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자유 보장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3.3. 콘텐츠 산업과 K-컬처 속 공동선 담론
K-드라마와 K-팝은 세계 소비자에게 한국적 “공동체주의” 이미지를 전파합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 공동체가 개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했고, BTS는 “Love Myself” 캠페인을 통해 관계적 자기애와 사회적 기부를 연결했습니다. 이러한 대중문화는 자유 시장에서 개인 창의성을 극대화하면서도, ‘함께 살아가기’라는 공동선을 기획 서사로 내세웁니다. 글로벌 팬덤은 기부, 해시태그 캠페인을 통해 가상의 초국가적 “공동체주의” 실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3.4. 게임·메타버스 문화와 가상 공동체주의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Z세대는 현실보다 가상 공간에서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비율이 높습니다. 국내 게임 로스트아크, 해외 플랫폼 로블록스 등에서 길드 활동, 아이템 거래, 공략 정보 공유는 프랙탈 공동체주의로 불립니다. 이는 대규모 상호작용이 아닌, 필요 기반 소규모 팀이 반복적으로 재편되는 특징을 가집니다. 개인은 자율적으로 참여와 탈퇴를 오가며, 동시에 집단 미션 클리어를 위해 협력합니다. 이런 구조는 자유주의·계약론 모델보다 “공동체주의”적 상호의존을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P2E(Play-to-earn) 모델이 도입될 경우, 경제적 가치가 연결되어 공동선과 개인 이익 간 균형 논쟁이 새롭게 전개됩니다.
3.5. 재외동포 네트워크와 트랜스내셔널 정체성
280만 명에 달하는 재외동포 사회는 국적, 세대, 언어 사용이 다양하지만, 각종 모국 기부 캠페인, 한인회 및 한글학교처럼 느슨하면서도 강한 유대의 플랫폼을 만들어 왔습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케이 트리플(공부·교류·기여) 모델을 통해 조국 사회 문제 해결에 관여하며, 동시에 현지 사회와의 통합을 모색합니다. 예컨대, 미국 애틀랜타 총격 사건 이후 한인 커뮤니티는 현지 NGO·시 정부와 협력해 아시아계 증오범죄 대응 프로그램을 구축했습니다. 이처럼 국경을 넘는 온라인 네트워크는 공동체 소속감과 다문화 자유 사이의 새로운 균형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4. 개인 자유와 공동선의 균형을 위한 철학적·정책적 제언
4.1. 관계적 자유 개념의 재정립
정치철학자 제니퍼 네드엘스키(Jennifer Nedelsky)는 자유를 ‘관계적 구성물’로 정의하며, 타인과의 상호의존이 자유의 조건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동아시아 “공동체주의” 전통과 일정 부분 공명합니다. 한국 사회는 관계 기반 자유 개념을 법·제도 설계에 반영함으로써, 개인 권리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상호 책임을 제도화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민법의 가족 상속·돌봄 의무 규정을 개편하여 ‘돌봄 시간권’을 신설하고, 이를 사회보험으로 보장하면, 가족 내 비공식 돌봄 부담을 사회가 분담할 수 있습니다.
4.2. 디지털 참여 기반 숙의 민주주의
“공동체주의”가 권위주의적 결정을 정당화하지 않으려면, 시민 참여 절차를 강화해야 합니다. 최근 정부·지자체는 온라인 공론장 플랫폼(예: 광화문1번가)을 운영하며 정책 제안을 수렴하는데, 참가자의 연령·성별·지역 대표성을 확보하는 알고리즘을 도입해 공정성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가 패널과 시민배심원단이 협력하는 복합형 숙의 모델은 공공선과 개인 자유의 균형점을 찾기 위한 실험으로 주목받습니다.
4.3. 교육 과정 속 시민윤리 혁신
초·중등 교육과정에 “공동체주의” 가치와 개인 권리 교육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현재 도덕 교과서는 효·우애·질서를 강조하는 반면, 표현의 자유나 성적 자기결정권 같은 현대적 권리교육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을 통해 지역사회 문제 해결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헌법적 권리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는 방식이 제안됩니다. 학생들은 실제 갈등 상황에서 공동체와 개인 자유의 조율 경험을 쌓게 됩니다.
4.4. 다층 거버넌스 모델 구축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 경기도 주민참여예산 등은 지방정부 단위에서 “공동체주의”를 제도화한 사례입니다. 하지만 동일 사업이라도 시·군·구마다 지침이 상이하여 권리·의무 균형이 흔들리는 문제가 지적됩니다. 중앙·지방·시민사회·시장 네트워크가 대칭적으로 협력하는 다층 거버넌스 설계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중앙정부는 평가 프레임을 제공하고, 지방정부는 생활 밀착 사업을 운영하며, 민간 기업은 데이터와 기술을 지원하고, 시민은 숙의 플랫폼을 통해 의사 결정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도, 넓은 의미의 “공동체주의”를 실천 가능한 정책 틀로 구체화합니다.
4.5. 공공 데이터 윤리와 알고리즘 투명성
스마트 시티 정책은 대중교통 데이터, CCTV 영상, 통신 기록 등 방대한 공공 데이터를 활용해 도시 효율성을 높입니다. 그러나 AI 알고리즘이 시민의 이동·소비 패턴을 실시간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생활 침해 우려가 커집니다. 한국에서는 2023년 개정된 개인정보보호법이 가명정보 제도를 확대하여, 데이터를 공동선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집단 이익과 개인 프라이버시 자유를 절충한 사례입니다. 동시에 알고리즘 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공동선이라는 명목 아래 차별적 결과가 발생할 수 있어, 참여적 거버넌스가 필수적입니다.
4.6. 인공지능 윤리 규범과 관계 지향 의사결정
국제표준화기구(ISO)와 IEEE가 추진 중인 AI 윤리 가이드라인은 투명성, 책임성, 공정성 원칙을 기본으로 하지만, 의사결정 환경에 따라 적용 방식을 달리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한국 정부 역시 2024년 AI 윤리 헌장을 발표하며 ‘상생’과 ‘인간 중심’을 핵심 가치로 담았습니다. 이는 사적 데이터, 알고리즘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사적 자유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개발자·이용자·영향을 받는 집단 간 대화 구조를 제도화하려는 방향성입니다. 전문가들은 AI 거버넌스에 시민배심원단 모델을 도입해, 실제 서비스 영향 평가에 주민 의견을 반영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기술 혁신이 인간 주체성을 위협하기보다 강화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4.7. 종합적 전망과 정책 로드맵
앞으로 10년간 한국은 초저출산·고령화, 디지털 전환, 기후 위기라는 복합적 과제에 직면합니다. 복지·산업·교육 정책은 어느 하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통합 전략 맵으로서 ‘사회적 투자 국가’ 모델을 제안합니다. 이는 아동·청년·노년을 아울러 인간 역량 형성에 집중 투자하고, 삶의 전주기에 걸쳐 사회적 위험을 분산하는 방식입니다. 정책 우선순위로는 △돌봄 인프라 공공성 확대 △중소기업 친가족적 노동환경 조성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강화 △지역 기반 재생에너지 사업 등이 꼽힙니다. 이러한 정책 결합은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면서도, 시민 각자가 자기 삶의 설계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5. 결론
한국 사회는 유교적 “공동체주의” 유산과 근대적 개인 자유 담론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해 온 실험실입니다. 가족 부양 의무, 출산 장려 정책, 방역 조치,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 등 다양한 현상은 이 둘이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상보적으로 작동함을 보여줍니다. 관건은 두 가치 중 하나를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인간관과 권리 기반 제도를 정교하게 엮어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본 글이 제안한 제도·교육·참여 모델을 통해, 한국이 ‘관계적 자유’라는 창의적 사회계약을 완성하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는 글로벌 규범이 확산되면서, 한국 사회는 기존 가족·학교·기업 중심의 공동체 구성을 넘어 시민 각자가 선택 가능한 다중 소속 구조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는 전통 공동체 모델을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질과 형식을 다변화함으로써 안정성과 창의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론장 접근성 제고, AI 기반 맞춤형 복지 설계,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 화해 프로그램 등 복합 전략이 요구됩니다. 철학적으로는 개인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이 관계 책임과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은 동아시아 전통을 현대 민주주의 가치와 연결하는 고유한 모델을 창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사이트
- 통계청: 한국 사회·경제 통계 데이터 제공
- 보건복지부: 복지·보건 정책 자료 및 통계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철학 이론 및 주요 사상가 해설
- OECD: 국제 비교 사회정책 지표 및 보고서
참고 연구
- Bell, D. A. (2016). The China model: Political meritocracy and the limits of democracy. Princeton University Press.
- Choi, J. (2021). Public health and communitarian ethics in Korea’s COVID-19 response. Asian Bioethics Review, 13(3), 229–245.
- Kim, K. S., & Park, J. Y. (2022). Family, state, and welfare in South Korea. Journal of Asian Public Policy, 15(2), 187–206.
- Tu, W. (1998). Confucian traditions in East Asian modernity. Harvard University Press.
- Rawls, J. (1971). A theory of justice. Harvard University Press.
동아시아 공동체주의와 개인 자유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주의”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가족, 학연, 지연과 같은 끈끈한 관계망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은 동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폰 보급률, 1인 가구 증가율, 정치적 다원화 지수를 기록하며 개인주의적 생활 양식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긴장은 철학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개인의 권리가 강조되는 자유주의적 논리가 공존하는 가운데, 유교 전통에 기반한 관계윤리가 여전히 강력한 규범적 힘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본 글은 동아시아 “공동체주의”의 역사적 토대와 현대적 변형을 살피고, 한국 정책·문화 현상 속에서 어떻게 개인 자유와 충돌 혹은 상보적 작용을 하는지를 고찰합니다. 나아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동선과 사적 자유를 조화롭게 맞추기 위한 현실적 제언을 탐색하고자 합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 원격 근무와 탈중앙화 금융(DeFi)의 부상은 사회적 소속감과 개인적 이동성 사이의 경계를 재정의했습니다. 블록체인 기반 거버넌스 모델은 지역·국가를 초월한 집단 의사 결정을 가능케 하며, 이 과정에서 “공동체주의”가 기술적 프로토콜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탈중앙화 자율조직(DAO)이 사회 공헌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기여도에 따라 토큰을 분배하지만 디지털 공동선을 우선으로 설정하는 논의가 활발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시민에게도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1. 동아시아 전통과 공동체주의의 기원
1.1. 유교 관계윤리의 핵심 개념
“공동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아시아 고전 윤리사상의 심장부를 차지하는 유교를 살펴야 합니다. 공자와 맹자는 인간을 고립된 원자적 존재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인(仁)”은 타자와의 상호 돌봄을 의미하며, “예(禮)”는 그 돌봄을 구체적 행위로 표현하는 사회적 장치였습니다. 서양 근대의 자연권 사상과 달리, 유교는 보편적 인간권리를 추상적으로 선언하기보다 가부장적 가족, 군신, 장유질서 같은 미시적 관계망 속 역할 규범을 통해 질서를 구현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 한국에서도 효(孝)에 대한 법적·문화적 기대, 명절 귀성 문화, 직장 내 선후배 호칭 관습 등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별 행위자의 자율성을 해석할 때도 관계적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의 토대가 형성됩니다.
동시에 유교는 단순히 권위주의적 질서만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군주라도 도덕적 정당성을 잃으면 “혁명”을 통해 폐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백성의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폭정과 맞서 정당화된 저항권을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전통 내부에서도 개인의 목소리가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즉 동아시아 “공동체주의”는 개인 권리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관계적 책임과 결합된 권리로 재해석합니다.
더 나아가 조선 후기에 형성된 향약 제도는 지역 공동체가 자치 규범을 세우고 상호 부조를 제공한 사례로 주목됩니다. 향약은 현대 마을회, 새마을금고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구성원은 상호 감시와 공개적 토론을 통해 도덕적 규범을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공동체주의”는 국가 권위에 종속된 수직 구조만이 아니라 수평적 자치를 실험한 장면도 포함합니다.
1.2. 개인 권리 담론과의 초기 조우
19세기 말 개화기 조선 지식인들은 국제법, 천부인권이라는 새로운 어휘를 일본어 번역서를 통해 접했습니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전통 윤리와 개인 권리 담론이 처음 대면한 순간이었습니다. 박영효와 김옥균 등이 제안한 갑신정변 헌의 14개조에는 신분 폐지, 과세 평등, 인재 등용 등 근대적 시민권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와 왕실을 보좌한다”는 유교적 충효 어법 역시 유지되었습니다. 이중 코드는 이후 대한민국 헌법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1948년 제헌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규정하면서도, 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라는 국민 공동체 서사를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초기 근대화 단계부터 한국은 자유주의적 개인 권리와 “공동체주의”적 공익 의무를 혼합해 나갔습니다.
1.3.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본 공동체주의 전통
비교철학 연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 윤리, 아프리카 우분투 윤리 등이 동아시아 “공동체주의”와 어떻게 교차하는지 탐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스 공동체 속 덕 있는 시민을 강조한 점, 우분투가 “내가 곧 우리”라는 전제를 두는 점이 모두 관계적 인간론이라는 공통분모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유교의 “공동체주의”는 가족 중심 서열을 기반으로 하기에, 공·사 영역 구분과 젠더 평등 문제에서 더 큰 도전을 받습니다. 이러한 비교는 한국 사회가 보편 윤리와 특수 문화 사이에서 어떤 변형 가능한 문화적 번역을 수행할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1.4. 중국·일본의 관계 윤리와의 비교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도 전통 윤리에서 발견되는 관계 중심적 가치가 현대 정책에 스며 있습니다. 일본의 이바시라(居場所) 개념은 지역 공동체에서 ‘머물 곳’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의미하며, 고립 노인을 지원합니다. 중국은 샤오캉(小康) 사회 건설 목표 아래, 농촌 가족이주 노동자의 도시 정착권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국가 모두 고령화 속도가 빠르면서도 가족 규모가 축소되어, 관계 의무를 국가·지역으로 이전하려는 공공정책 실험이 활발합니다. 이 비교는 한국이 직면한 복지·돌봄 문제를 맥락화하며, 국제 경험을 활용한 혁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2. 정책 사례: 가족주의 복지 시스템의 빛과 그늘
2.1. 노인 부양 의무와 국민연금
한국 복지국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족 의존적 설계입니다. 공적 부조가 충분하지 않은 영역을 사적 가족 네트워크가 메꾼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 유산이 선명합니다. 이를테면 2021년까지 유지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은 저소득 노인이 기초생활급여를 신청하려면 자녀의 소득·재산을 먼저 심사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녀와 갈등 관계인 노인은 제도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곤 했습니다. 정부는 2022년 부분 폐지를 결정했지만,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자식을 둔 부모는 국가보다 가정이 책임져야 한다”는 정서가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구조는 “공동체주의”가 개인의 사회권 실현을 어떻게 제약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예시입니다.
한편 국민연금은 근본적으로 개인 납입액에 기반한 기여·소득비례 방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산업화 세대가 대가족 체제에서 노후를 의존해 왔다는 점을 고려해, 부양가족연금 같은 가족 단위 급여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전통적 효 문화와 근대적 사회보험 논리가 타협한 결과이며, “공동체주의”가 복지 설계에서 여전히 설득력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2. 출산 장려 정책과 여성의 경력권
출산율 하락은 “공동체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시험하는 쟁점입니다. 정부는 다자녀 특별공급, 육아휴직 급여 확대, 아동수당 등을 통해 가족 단위 복지를 강화해 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여성은 경력 단절과 돌봄 부담이 실질적으로 완화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전통적 성 역할 분담을 유지한 채 출산만 독려하는 정책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개인 자유를 침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1인 가구와 비혼 가구가 급증하는 현실에서, 가족 중심 출산 장려책은 선택하지 않은 시민을 배제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주의” 가치인 인구 공동선과 개인 자유를 조화시키려면 돌봄 인프라의 국가 책임을 강화하고 성평등한 노동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2.3. 장기요양보험과 돌봄 노동의 사회화
한국의 장기요양보험제도는 2008년 도입 이후 급속히 확장되며, 가족 내 무급 돌봄 부담을 제도화된 사회보험으로 이전했습니다. 돌봄 활동이 국가 공적 서비스로 전환되면서, 전통적 “공동체주의”가 개인의 성별 역할을 고정하던 관성을 부분적으로 해체했습니다. 그러나 요양보호사의 낮은 임금과 감정노동 문제가 남아, 공동체 가치가 ‘돌봄의 사회적 인정’으로까지 확장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이는 “공동체주의”가 가족 범위를 넘어 사회 전체로 재해석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2.4. 지역사회 돌봄 모델과 사회적 경제
행정안전부가 추진하는 지역사회 통합 돌봄(커뮤니티 케어) 선도사업은 노인·장애인이 살던 곳에서 돌봄을 받도록 지원합니다. 여기서 ‘마을’은 국가와 가족 사이의 중간단위로서, 전통적 “공동체주의”의 현대적 실험실이 됩니다. 시흥시는 사회적 협동조합과 연계해 방문간호, 주거 개보수를 제공하며, 이용자는 자신의 생활리듬을 유지하면서도 자율성을 보호받습니다. 사회적 경제 주체가 주도함으로써, 돌봄을 시장 거래가 아닌 관계적 가치로 전환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자체 예산 의존도가 높아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있으며, 서비스 품질 관리 지표가 표준화되지 않았다는 점이 과제로 지적됩니다.
2.5. OECD 비교지표가 말하는 한국 복지의 특수성
OECD의 Social Expenditure Database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공공 사회지출은 GDP 대비 12.7%로, 회원국 평균 21.1%에 크게 못 미칩니다. 특히 가족·노인 부문 현금급여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고, 조세 지출(세제 혜택) 형태가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제도 외부의 돌봄·부양 기능을 여전히 가정이 수행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교육 분야 지출이 평균을 상회한다는 사실인데, 이는 학부모 사교육 투자와 맞물려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반영합니다. 결국 복지의 범위와 구조를 설계할 때, 재정적 효율성뿐 아니라 문화적 기대와 사회적 신뢰를 함께 고려해야 함이 드러납니다.
3. 문화 현상: 온라인 커뮤니티와 공적 담론의 재편
3.1. 세대·젠더 갈등 속의 관계윤리 재구성
2020년대 한국 온라인 공간에서는 ‘MZ세대’와 ‘586세대’,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 간 갈등이 자주 표면화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각 진영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때 모두 “공동체주의”적 언어를 차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장년층은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온 것은 집단 헌신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연대 의무를 강조합니다. 반면 젊은 층은 “공정한 규칙이 무너진 공동체주의는 기득권 카르텔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크라우드 펀딩, 팬덤 기부 등)를 선보입니다. 이처럼 디지털 문화는 전통 공동체 조직을 해체하는 동시에, 네트워크 기반 ‘느슨한 공동체주의’를 만들어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양면성을 지닙니다.
3.2. 코로나19 방역 사례: 집단적 선의와 자유의 상호작용
코로나19 초기 한국의 고강도 방역 정책은 해외 언론으로부터 “공동체주의”적 협력 모델로 평가받았습니다. 마스크 착용, QR 코드 출입명부, 방역 앱 자가진단 보고 등은 개인 정보 공개를 전제로 했지만, 다수 시민이 이를 감수했기에 확산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방역패스 도입 과정에서 “백신 접종을 거부할 자유”와 “집단 면역이라는 공동선”이 충돌하였고, 헌법소원과 행정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법원은 비례성 원칙을 기준으로 일부 조치를 제한하며 개인 자유를 보호했습니다. 이 사례는 위기 상황에서도 “공동체주의”가 절대적인 규범이 아니라, 민주적 숙의를 거쳐 조정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마스크 착용 의무는 2022년 단계적 해제 과정에서, 장애인·노년층의 건강권과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 자유가 첨예하게 충돌했습니다. 교육부는 학교 방역 지침을 수정해 투명 마스크 지원을 확대했고,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수어 통역 방안을 병행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공동체주의” 감염 예방 목표를 유지하면서, 개인이 처한 특수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자유 보장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3.3. 콘텐츠 산업과 K-컬처 속 공동선 담론
K-드라마와 K-팝은 세계 소비자에게 한국적 “공동체주의” 이미지를 전파합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 공동체가 개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했고, BTS는 “Love Myself” 캠페인을 통해 관계적 자기애와 사회적 기부를 연결했습니다. 이러한 대중문화는 자유 시장에서 개인 창의성을 극대화하면서도, ‘함께 살아가기’라는 공동선을 기획 서사로 내세웁니다. 글로벌 팬덤은 기부, 해시태그 캠페인을 통해 가상의 초국가적 “공동체주의” 실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3.4. 게임·메타버스 문화와 가상 공동체주의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Z세대는 현실보다 가상 공간에서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비율이 높습니다. 국내 게임 로스트아크, 해외 플랫폼 로블록스 등에서 길드 활동, 아이템 거래, 공략 정보 공유는 프랙탈 공동체주의로 불립니다. 이는 대규모 상호작용이 아닌, 필요 기반 소규모 팀이 반복적으로 재편되는 특징을 가집니다. 개인은 자율적으로 참여와 탈퇴를 오가며, 동시에 집단 미션 클리어를 위해 협력합니다. 이런 구조는 자유주의·계약론 모델보다 “공동체주의”적 상호의존을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P2E(Play-to-earn) 모델이 도입될 경우, 경제적 가치가 연결되어 공동선과 개인 이익 간 균형 논쟁이 새롭게 전개됩니다.
3.5. 재외동포 네트워크와 트랜스내셔널 정체성
280만 명에 달하는 재외동포 사회는 국적, 세대, 언어 사용이 다양하지만, 각종 모국 기부 캠페인, 한인회 및 한글학교처럼 느슨하면서도 강한 유대의 플랫폼을 만들어 왔습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케이 트리플(공부·교류·기여) 모델을 통해 조국 사회 문제 해결에 관여하며, 동시에 현지 사회와의 통합을 모색합니다. 예컨대, 미국 애틀랜타 총격 사건 이후 한인 커뮤니티는 현지 NGO·시 정부와 협력해 아시아계 증오범죄 대응 프로그램을 구축했습니다. 이처럼 국경을 넘는 온라인 네트워크는 공동체 소속감과 다문화 자유 사이의 새로운 균형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4. 개인 자유와 공동선의 균형을 위한 철학적·정책적 제언
4.1. 관계적 자유 개념의 재정립
정치철학자 제니퍼 네드엘스키(Jennifer Nedelsky)는 자유를 ‘관계적 구성물’로 정의하며, 타인과의 상호의존이 자유의 조건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동아시아 “공동체주의” 전통과 일정 부분 공명합니다. 한국 사회는 관계 기반 자유 개념을 법·제도 설계에 반영함으로써, 개인 권리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상호 책임을 제도화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민법의 가족 상속·돌봄 의무 규정을 개편하여 ‘돌봄 시간권’을 신설하고, 이를 사회보험으로 보장하면, 가족 내 비공식 돌봄 부담을 사회가 분담할 수 있습니다.
4.2. 디지털 참여 기반 숙의 민주주의
“공동체주의”가 권위주의적 결정을 정당화하지 않으려면, 시민 참여 절차를 강화해야 합니다. 최근 정부·지자체는 온라인 공론장 플랫폼(예: 광화문1번가)을 운영하며 정책 제안을 수렴하는데, 참가자의 연령·성별·지역 대표성을 확보하는 알고리즘을 도입해 공정성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전문가 패널과 시민배심원단이 협력하는 복합형 숙의 모델은 공공선과 개인 자유의 균형점을 찾기 위한 실험으로 주목받습니다.
4.3. 교육 과정 속 시민윤리 혁신
초·중등 교육과정에 “공동체주의” 가치와 개인 권리 교육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현재 도덕 교과서는 효·우애·질서를 강조하는 반면, 표현의 자유나 성적 자기결정권 같은 현대적 권리교육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을 통해 지역사회 문제 해결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헌법적 권리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는 방식이 제안됩니다. 학생들은 실제 갈등 상황에서 공동체와 개인 자유의 조율 경험을 쌓게 됩니다.
4.4. 다층 거버넌스 모델 구축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 경기도 주민참여예산 등은 지방정부 단위에서 “공동체주의”를 제도화한 사례입니다. 하지만 동일 사업이라도 시·군·구마다 지침이 상이하여 권리·의무 균형이 흔들리는 문제가 지적됩니다. 중앙·지방·시민사회·시장 네트워크가 대칭적으로 협력하는 다층 거버넌스 설계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중앙정부는 평가 프레임을 제공하고, 지방정부는 생활 밀착 사업을 운영하며, 민간 기업은 데이터와 기술을 지원하고, 시민은 숙의 플랫폼을 통해 의사 결정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도, 넓은 의미의 “공동체주의”를 실천 가능한 정책 틀로 구체화합니다.
4.5. 공공 데이터 윤리와 알고리즘 투명성
스마트 시티 정책은 대중교통 데이터, CCTV 영상, 통신 기록 등 방대한 공공 데이터를 활용해 도시 효율성을 높입니다. 그러나 AI 알고리즘이 시민의 이동·소비 패턴을 실시간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생활 침해 우려가 커집니다. 한국에서는 2023년 개정된 개인정보보호법이 가명정보 제도를 확대하여, 데이터를 공동선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집단 이익과 개인 프라이버시 자유를 절충한 사례입니다. 동시에 알고리즘 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공동선이라는 명목 아래 차별적 결과가 발생할 수 있어, 참여적 거버넌스가 필수적입니다.
4.6. 인공지능 윤리 규범과 관계 지향 의사결정
국제표준화기구(ISO)와 IEEE가 추진 중인 AI 윤리 가이드라인은 투명성, 책임성, 공정성 원칙을 기본으로 하지만, 의사결정 환경에 따라 적용 방식을 달리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한국 정부 역시 2024년 AI 윤리 헌장을 발표하며 ‘상생’과 ‘인간 중심’을 핵심 가치로 담았습니다. 이는 사적 데이터, 알고리즘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사적 자유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개발자·이용자·영향을 받는 집단 간 대화 구조를 제도화하려는 방향성입니다. 전문가들은 AI 거버넌스에 시민배심원단 모델을 도입해, 실제 서비스 영향 평가에 주민 의견을 반영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기술 혁신이 인간 주체성을 위협하기보다 강화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4.7. 종합적 전망과 정책 로드맵
앞으로 10년간 한국은 초저출산·고령화, 디지털 전환, 기후 위기라는 복합적 과제에 직면합니다. 복지·산업·교육 정책은 어느 하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통합 전략 맵으로서 ‘사회적 투자 국가’ 모델을 제안합니다. 이는 아동·청년·노년을 아울러 인간 역량 형성에 집중 투자하고, 삶의 전주기에 걸쳐 사회적 위험을 분산하는 방식입니다. 정책 우선순위로는 △돌봄 인프라 공공성 확대 △중소기업 친가족적 노동환경 조성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강화 △지역 기반 재생에너지 사업 등이 꼽힙니다. 이러한 정책 결합은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면서도, 시민 각자가 자기 삶의 설계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5. 결론
한국 사회는 유교적 “공동체주의” 유산과 근대적 개인 자유 담론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해 온 실험실입니다. 가족 부양 의무, 출산 장려 정책, 방역 조치,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 등 다양한 현상은 이 둘이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상보적으로 작동함을 보여줍니다. 관건은 두 가치 중 하나를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인간관과 권리 기반 제도를 정교하게 엮어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본 글이 제안한 제도·교육·참여 모델을 통해, 한국이 ‘관계적 자유’라는 창의적 사회계약을 완성하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는 글로벌 규범이 확산되면서, 한국 사회는 기존 가족·학교·기업 중심의 공동체 구성을 넘어 시민 각자가 선택 가능한 다중 소속 구조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는 전통 공동체 모델을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질과 형식을 다변화함으로써 안정성과 창의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론장 접근성 제고, AI 기반 맞춤형 복지 설계,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 화해 프로그램 등 복합 전략이 요구됩니다. 철학적으로는 개인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이 관계 책임과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은 동아시아 전통을 현대 민주주의 가치와 연결하는 고유한 모델을 창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사이트
- 통계청: 한국 사회·경제 통계 데이터 제공
- 보건복지부: 복지·보건 정책 자료 및 통계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철학 이론 및 주요 사상가 해설
- OECD: 국제 비교 사회정책 지표 및 보고서
참고 연구
- Bell, D. A. (2016). The China model: Political meritocracy and the limits of democracy. Princeton University Press.
- Choi, J. (2021). Public health and communitarian ethics in Korea’s COVID-19 response. Asian Bioethics Review, 13(3), 229–245.
- Kim, K. S., & Park, J. Y. (2022). Family, state, and welfare in South Korea. Journal of Asian Public Policy, 15(2), 187–206.
- Tu, W. (1998). Confucian traditions in East Asian modernity. Harvard University Press.
- Rawls, J. (1971). A theory of justice. Harva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