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고대 그리스 이래 수천 년 동안 사상가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 질문 자체에 숨겨진 전제를 폭로하며, 정의를 법적 규범이나 제도적 절차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근본적으로 흔들었습니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표면적으로 완결된 체계를 구성하는 언어‧텍스트 내부의 균열을 추적하고, 그 균열이 외부로 연장되는 과정을 포착합니다. 이 글은 데리다의 핵심 개념인 ‘지연(différance)’과 ‘추적(trace)’을 법‧정의 담론에 적용함으로써, 전통적 법철학이 전제하는 배제 구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이상과 ‘정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동시에 부여받습니다. 하지만 실제 재판 과정이나 입법 과정에서 목소리가 지워지거나, 경험이 번역되지 못한 채 재료로 전환되는 사례는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데리다가 말한 지연과 추적은 이러한 부재와 침묵의 흔적을 가시화하는 렌즈가 됩니다. 따라서 법사상 연구는 더 이상 규범의 일관성만을 논증하는 학문이 아니라, 목소리 없는 주체들의 흔적을 읽어내고 그 간격에서 정의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실천으로 변모해야 합니다.
1. 데리다의 해체론과 의미의 운동
1.1. 지연(différance): 의미의 미끄러짐
지연은 ‘차이(différence)’와 ‘연기(to defer)’를 동시에 함축하는 데리다의 조어로, 의미가 고정된 현재 시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다음 기표를 향해 미뤄진다는 통찰입니다. 예컨대 “정의”라는 단어를 발화할 때 화자는 이미 앞선 담론 속 정의들의 흔적을 불러오지만, 동시에 그것을 완전히 동일한 형태로 재현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정의의 지연은 법령에 명시된 조문이나 판례로도 결코 완결될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법철학은 규범의 닻을 내리는 대신, 의미가 연기되는 지평 속에서 실제 삶의 경험을 다시 사유할 필요성을 발견합니다. 이는 전통적 법철학과 구성주의 법이론이 공유해 온 실증주의적 전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논제입니다.
지연 개념은 법률 언어가 가지는 자기 지시성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합리적 의심 없는 증거”처럼 실정법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는 그 자체로 자명성을 주장하지만, 구체적 사건에 적용되는 순간 수사학적 교섭 과정을 거칩니다. 재판부는 증거의 신빙성을 검토하며, 변호인은 언어의 모호성을 활용해 다른 해석을 제시합니다. 지연은 이 같은 해석의 간극을 은폐하는 권위적 정의 담론에 균열을 내고, 법철학이 언어적 체험을 전면에서 다루도록 요청합니다.
1.2. 추적(trace): 흔적과 탈중심화
추적은 의미가 부재 속에서도 남기는 잔향을 가리키며, 데리다에게서 현전(presence)의 신화를 해체하는 관건입니다. 목소리는 사라지되 그 메아리가 공간을 채우듯, 법 체계에서도 배제된 주체의 경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문처럼 남아 제도의 경계를 규정합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형사 사법절차에서 외국인이 통역의 질적 격차로 판결 결과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사례는 언어적 권력 차이가 만든 추적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례는 법철학의 논의가 단순히 국적 보편성 담론에 머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추적은 기록과 아카이브가 지닌 정치성을 예리하게 조명합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재심 자료를 보면, 피의자 진술서 곳곳에 검열 흔적과 공란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편집의 경계는 법적 사실의 경계와 겹치며, 어떤 목소리가 보존되고 어떤 목소리가 삭제되는지를 결정합니다. 법철학은 해당 흔적들에 접근해 “무엇이 기록되고 무엇이 잊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정의의 조건을 재구성합니다. 이 문제의식은 미래 지향적 법철학을 구성하는 핵심 전제가 됩니다.
2. 법철학의 전통적 전제, 그리고 그 한계
2.1. 규범성과 보편성
전통적 법사상은 ‘법적 명령(norm)’을 보편적 이성 혹은 자연법의 반영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론부터 칸트의 의무론적 정의론까지, 규범의 울타리는 인간 이성이 공유하는 불변의 형식을 지향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주의와 젠더 억압의 역사가 말해주듯, 이 보편성은 실제로는 특정 시공간의 경험과 가치를 중심화한 결과물입니다. 데리다의 지연은 보편성의 명령을 지키려는 시도를 ‘도달 불가능한 약속’으로 재규정하고, 추적은 그 약속이 놓친 타자의 흔적을 불러냅니다. 법사상이 보편성을 설계 원리로 삼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배제 문제를 반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규범성과 보편성의 결합은 입법 과정에도 깊이 박혀 있습니다. 예컨대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24년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정상적인 성 개념”을 전제한 여러 성폭력죄 관련 조항은 성적 다양성을 법적으로 인정하려는 국제 인권 기준과 상충합니다. 이처럼 법률 텍스트가 사회적 다원성을 배제하는 방식은 법사상이 검증해야 할 실천적 쟁점입니다. 지연을 통해 드러난 차이는 입법자가 상정한 평균적 시민과 실제 시민 사이의 간격이며, 추적은 그 간격 속에서 억눌린 서사를 가시화합니다.
2.2. 정의 담론의 배제 구조
미국 대법원이 2020년 ‘Bostock v. Clayton County’ 판결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연방 민권법의 “sex” 항목에 포함한다고 판시했을 때, 판결문에는 역설적으로 “인간 경험의 가변성”이라는 어휘가 기계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이는 정의 담론이 다수파의 승인 아래서만 확장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보여줍니다. 국내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 기후 난민, 디지털 성범죄 등 새로운 사회적 갈등이 제도적 언어 바깥에서 부유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제도 내로 단순 흡수하기보다는, 제도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고 가능성의 문턱을 넓히는 작업에 주력해야 합니다.
지연과 추적을 도입한 분석은 정의 담론이 얼마나 쉽게 특정 주체를 ‘합법’과 ‘불법’의 이분법적 틀에 가둔다고 간주하는지 폭로합니다. 동시에 이런 폭로가 공허한 냉소로 끝나지 않으려면, 대안적 어휘를 발굴하고, 배제된 목소리의 서사적·증거적 가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3. 지연과 추적으로 다시 읽는 법‧정의
3.1. 규범의 지연: 법적 시간성과 잠재성
법률은 과거 사건을 판단하기 위해 제정되지만, 동시에 그 판단은 미래 판례의 선례가 됩니다. 이 시간적 이중 구조 속에서 지연은 법언어가 항상 ‘이미 늦은 정의’를 선언하고 있음을 폭로합니다. 예를 들어, 안경환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기록 말소 사건에서 드러난 과거 ‘허위 혼인신고’의 법적 의미는, 1970년대 가족법 개정 운동이 제기했던 여성의 법적 지위 문제와 연결됩니다. 사건이 발생한 시대에는 불문율로 지나간 문제가 나중에 등장한 법률 개정을 통해 새롭게 문제화되는 과정은 지연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법철학은 시간적 간극을 인식하고, 잠재적 정의의 층위를 탐구하는 방법론을 채택해야 합니다.
미래지향적 입법의 난제를 볼 때도 지연 개념은 유용합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은 2050년 순배출량 0을 선언하지만, 현재 기술 수준과 산업 구조로는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내세웁니다. 선언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법은 상징자본으로 기능하며, 이는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에 동원될 수 있습니다. 해체적 시각은 이러한 ‘미래 약속’의 언어를 해집어, 법이 구축하려는 통치 역학을 드러냅니다. 결국 법철학은 장기 계획법 안에 감춰진 권력의 시나리오를 해부할 통찰이 필요합니다.
3.2. 흔적과 증거: 판례 읽기의 재구성
추적은 형사소송법상의 ‘증거의 자유심증주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심증은 심판자가 내적 확신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바탕은 기록의 편집 방식, 언론 보도, 사회적 편견 등 수많은 외부 요인과 얽혀 있습니다. 예컨대 ‘손정민 사망 사건’ 보도 과정에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생산한 비공식 정보들은 수사 방향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뒤이은 재판 과정에서 법원은 포렌식 결과만을 증거로 채택했지만, 여론이 남긴 흔적은 판결문 밖에서 사건의 사회적 해석을 좌우했습니다. 법철학은 공식 기록과 비공식 기록의 경계를 좁히기보다, 두 층위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위계화되는지를 분석합니다.
추적 개념은 또한 ‘증거 개방(discovery)’ 제도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미국 연방 법원에서 시행되는 이 제도는 재판 당사자 간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기 위해 설계되었지만, 실제로는 정보량이 방대할수록 재정‧인적 자원이 부족한 약자가 불리해집니다. 디지털 포렌식 파일, 내부 이메일, 머신러닝 분석 보고서까지 포함하는 현대적 증거 세트는 다국적 기업이나 정부 기관처럼 거대 조직에게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해체적 법철학은 데이터셋 내부 윤리와 필터링 과정을 추적해, ‘객관적’ 증거가 구축되는 메커니즘 자체를 정치화합니다.
3.3. 사법적 언어의 해체적 실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과타리가 제안한 ‘소수언어(minor literature)’ 개념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거대 언어 체계를 비틀어 저항 서사를 창출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데리다의 추적은 이 소수언어 전략과 결합해, 법률 문서의 기표‧기의 관계를 변조하는 사법적 실천을 상상하게 합니다. 2021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청각 장애인을 위해 수어 통역을 전자 법정 시스템에 상시 도입하기로 한 판례는, 다수언어 중심 법정 언어를 탈중심화한 사례입니다. 이 결정은 법철학의 목적을 선언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지연과 추적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적 정의의 지평을 넓힌 셈입니다.
해체론적 작업은 ‘대안 판결문’ 작성 실험에서도 확인됩니다. 서울대학교 공익법률센터 학생들이 진행한 프로젝트 중에는 실제 판례를 재구성해, 판결 이유를 장애 감수성·젠더 감수성 중심으로 서술하는 사례가 포함됩니다. 이는 기존 판결문이 비가시화한 주체의 추적을 드러내고, 법적 서사에 새로운 시간과 감각을 도입합니다. 이런 실천은 이론 연구와 구체적 사건 분석을 조화시키려는 법철학의 확장된 역할을 보여줍니다.
3.4. 알고리즘 거버넌스와 해체적 독해
최근 사법 기관은 인공지능 위험 평가 도구를 채택해 피의자의 재범 가능성을 계산하고 양형 결정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COMPAS’ 시스템은 흑인 피고인에게 재범 가능성을 과대 추정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한국에서도 청소년 보호관찰 단계에서 예측 모델 시험 운영이 진행 중인데, 자치구별 사회경제 데이터나 학업 성취도를 변수로 투입하면서 구조적 불평등을 그대로 재현할 위험이 큽니다. 데이터셋에 새겨진 과거 차별의 흔적은 알고리즘 출력 단계에서 ‘과학적’ 권위로 둔갑하며, 결과적으로 사법적 판단의 책임성을 흐릴 수 있습니다.
지연의 관점에서 볼 때, 알고리즘 결과는 ‘현재’의 결정을 내리지만 그 근거는 과거에 수집된 데이터와 과거 시점의 편향된 정책조건에 묶여 있습니다. 추적은 데이터 수집에서 모델 학습, 패러미터 튜닝, 결과 시각화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탐사하며, 특정 집단이 시스템적으로 불리한 점수를 받게 된 메커니즘을 해명합니다. 데이터 컬럼 하나하나에 잠재된 이야기들은, 해체적 분석을 거칠 때만이 ‘얼만큼의 가중치’를 넘어 ‘누구의 목소리’가 배제됐는지 드러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캐나다 몬트리올시가 도입한 ‘AI 윤리 검증 프로토콜’은, 알고리즘 적용 전후 소수 집단 대표, 학계, 시민단체가 참여한 다층 검토 과정을 규정합니다. 프로토콜은 결과의 편향 지표뿐 아니라, 모델링 목적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우선적으로 심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는 법률 시스템이 자신의 결정 과정을 외주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책임 공백’을 예방하려는 시도이며, 데리다의 추적 개념이 기술적 현실에 접목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3.5. 기억의 재구성: 세월호 참사 특별법을 중심으로
2014년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 사회에 심대한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참사 이후 제정된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은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피해자 지원을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했지만, 유가족과 시민단체는 조사위원회 구성 절차와 기록 공개 범위를 두고 여전히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지연의 관점에서 볼 때, 진실 규명은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정의를 향한 지속적 요청입니다. 추적은 과정 중 사라진 증거, 삭제된 통신 기록, 위증 의혹 등을 상기시키며, 제도적 권위가 ‘종결’을 선언한 뒤에도 흔적이 남아 계속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듭니다.
특별법은 공청회·자료 제출·청문회를 통합한 다층적 조사 구조를 채택했으나, 정부 부처와 민간 기업이 제출한 자료의 완전성 여부를 검증하는 절차가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해체적 분석은 이 불충분한 기록 구조를 파헤치고, 어떤 정보가 ‘기밀’이라는 이유로 봉인되었는지, 어떤 증언이 ‘비공식’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는지 추적합니다. 2025년 말 종료 예정인 조사위원회 활동 시한이 다가오면서, 자료 검증과 보고서 편집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금 격화되고 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공백과 중복, 모순이 남겨질수록, 지연된 정의는 더 큰 정치적 압력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큽니다.
4. 배제 구조를 넘어선 법철학의 가능성
4.1. 탈중심적 입법: 다성적 절차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진행되는 공청회, 상임위 심사, 본회의 표결은 다수결 원칙에 의해 귀결됩니다. 해체론이 제안하는 ‘탈중심화’는 단순히 초과대표된 집단의 권한을 분산하자는 요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담론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며, 어느 하나도 상대를 ‘보완물’이나 ‘발전 단계’로 종속시키지 않는 의사결정 구조를 모색합니다. 2023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시행한 온라인 시민의회 실험은, 의회가 아닌 일반 시민 네트워크가 기후 정책 초안을 작성하고 정부가 이를 공식 검토하는 절차를 도입했습니다. 이 사례는 참여민주주의 모델이 입법권 독점 구조를 전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에서도 ‘국회 공청회 실시간 중계 후 시민 피드백 플랫폼’을 설계해, 정책 초안 단계부터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논의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도가 정착되면 법철학은 권력 중심의 위계적 규범 논증 대신, 다성적 합의 과정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4.2. 책임과 환대의 윤리
데리다는 “정의는 사건이며, 책임은 계산될 수 없는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 요구”라고 강조했습니다. 법제도가 계산 가능한 책임만을 관리 대상으로 삼는다면, 예컨대 난민 신청자나 디지털 플랫폼 노동자처럼 법적 지위가 불안정한 주체는 지속적으로 뒷전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환대(hospitality)의 윤리는 타자를 ‘내적 범주’로 수용하는 것을 넘어, 그 타자의 요구가 공동체 규범을 재구성하도록 초대하는 급진적 개방성을 지향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가 ‘대서사’의 해체 이후 도래한 ‘소서사’들의 교차를 논의한 맥락에서, 법철학은 책임을 확률적‧경제적 계산을 넘어선 윤리적 과잉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 제도 개혁 방안으로는 ‘조건부 체류 자격’을 넘어선 ‘공동체 기여 기반 지위’ 제도를 들 수 있습니다. 사회적 협동조합에 일정 기간 참여하거나 지역사회 기후 행동 프로젝트에 공헌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단계적 시민권 부여를 검토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참여와 책임의 상호성을 강화하면서도 경계 없는 환대의 실험적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델은 기존의 ‘기술 인력’ 중심 이민 정책이 지닌 경제주의적 편향을 완화시키며, 다문화 사회의 법철학적 정당성을 높입니다.
4.3. 추적 가능한 정의: 투명성과 기억
블록체인 기술은 해체론적 시각에서 특히 흥미로운 도구가 됩니다. 블록체인의 분산 장부 구조는 데이터 삭제가 불가능한 대신, 새로운 블록을 추가해 과거 기록을 ‘덮어쓰기’가 아닌 ‘이어쓰기’로 갱신합니다. 이는 추적 개념이 요구하는 “항상 남는 흔적”과 기술적 친화성을 보입니다. 예컨대 케냐 정부는 토지 소유권 분쟁 해결을 위해 블록체인 기반 등기 시스템을 시범 운영하고 있으며, 기록 변조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낮췄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국도 토지대장·건물대장을 분산 원장에 기록한다면, 변조와 이해 충돌 의혹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개인정보 보호와 기술 독점 문제가 동시에 제기되므로, 법철학은 기술 규제 담론과 정치경제학을 연결해 다층적 검증 체계를 마련해야 합니다.
기억의 정치학 역시 해체적 법철학에서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전환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 논의를 보면, 과거사 청산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뿐 아니라 공백을 공동체 기억 속에 남겨두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한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보고서는 리포지토리 형식을 도입해, 검증되지 않은 증언마저 ‘잠정적 흔적’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는 지연 상태의 정의를 제도화하는 방식이며, 추적 가능한 정의의 조건을 충족합니다. 법철학은 이러한 사례를 통해 배제 구조를 넘어 후대가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기억 공간을 설계하는 새로운 책임 모델을 구상할 수 있습니다.
4.4. 교육과 공론장을 위한 해체적 문해력
제도 개혁이 실천되기까지는 시민이 법률 언어를 비판적으로 읽고 자신의 경험을 권리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문해력이 필요합니다. 핀란드의 ‘민주시민 교육 커리큘럼’은 중등 과정에서부터 판결문과 정책 보고서를 텍스트 분석 대상으로 삼아, 학생들이 법적 서사의 구성을 해체하는 연습을 하도록 돕습니다. 이러한 훈련은 법률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제도적 언어 뒤에 숨은 가정과 권력 관계를 감지하게 합니다. 지연을 배우면 학생들은 ‘효력이 발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주목하고, 추적을 통해 지워진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2024년 경기교육청이 시범 도입한 ‘생활 법교육 프로젝트’는 실제 지역 갈등 사례를 학습 자료로 활용해, 학생들이 중재안을 작성하고 모의 의회에서 토론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프로그램 평가 결과, 참여 학생 중 78%가 “법적 갈등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해졌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는 제도 언어의 절대성을 의심하고, 공동체 내 갈등을 다층적으로 분석하는 태도를 길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해체적 문해력은 개별 정책의 성공 여부를 넘어, 민주적 공론장의 심층 구조를 지속적으로 재편하는 동력입니다.
5. 결론: 해체 이후의 법철학적 과제
데리다의 지연과 추적은 법‧정의 담론을 구성하는 언어, 시간, 기억의 층위를 해체하는 동시에, 그 바닥에 잠재된 다른 정의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합니다. 이 글에서 살핀 것처럼 지연은 법령·판례·제도에서 무의식적으로 연기된 의미를 드러내고, 추적은 배제된 타자의 흔적을 읽어내어 정의 담론의 구조적 불완전성을 증언합니다. 결과적으로 법철학은 규범적 명령을 수호하는 학문이 아니라, 타자의 요구를 빗겨나간 언어‧제도‧기억의 결락을 분석하고, 그 결락이 가리키는 잠재적 정의를 창안하는 창의적 실천으로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물론 해체론적 비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능 열쇠는 아닙니다. 탈중심적 입법, 책임과 환대의 윤리, 추적 가능한 정의를 구현하려면 구체적 정책 설계와 예산 확보, 제도적 합의라는 험난한 과제가 뒤따릅니다. 그러나 해체가 보여준 잠재성의 공간은,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고 확산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차별 유형과 권력 기술이 출현하고 있으므로, 법철학은 지연되고 추적되는 의미를 추동력으로 삼아 끝없는 자기 갱신을 이어가야 합니다.
해체 이후의 과제는 단순히 기존 체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차이를 엮어 ‘결정 불가능성’ 속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유 도구를 확충하는 일입니다. 이는 인공지능 판결 보조 시스템이나 기후 정의 소송, 메타버스 내 법적 행위 규율 등 전방위로 확장되는 규범 지형에도 적용됩니다. 결국 법철학은 지연과 추적의 렌즈를 통해, 미래 사회가 직면할 복합적 갈등을 분석하고, 배제 없는 정의의 서사를 쓰는 동력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해체론은 연구 공동체 내부의 방법론적 성찰도 요구합니다. 언어철학, 사회학, 인공지능 연구가 서로의 사유 방식을 번역하는 다학제 협력을 통해서만, 지연과 추적이 제시하는 수수께끼를 체계적으로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원 세미나에서 판결문을 문학적 텍스트로 분석하거나, 데이터 과학자가 판례 코퍼스를 해체적 방법으로 재주석화하는 시도는 이미 일부 대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학문의 경계를 붕괴시키면서, 정의를 둘러싼 지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새로운 실험장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시민사회와 법률가가 함께 참여하는 열린 데이터 거버넌스 포럼이 필요합니다.
참고 사이트
- 대한민국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Court of Korea): 최신 결정례 및 헌법 재판제도 소개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Jacques Derrida: 데리다 해체론 개관
- 한국법제연구원(KLRI): 국내 입법 동향 및 법제 연구 보고서
- EJIL: Talk!: 국제법 및 정의 관련 학술 블로그
참고 연구
- Derrida, J. (1992).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 Cardozo Law Review, 11(5–6), 919–1045.
- Cornell, D. (1992). The philosophy of the limit. Routledge.
- Rosenfeld, M. (1994). Deconstruction and legal interpretation: Conflict, indeterminacy and the temptation of the new legal formalism. Cardozo Law Review, 14(5), 1367–1412.
- Goodrich, P. (2005). Derrida’s margin: Deconstruction and legal scholarship. Law and Critique, 16(2), 117–136.